‘제2 벤처 바람’ 선풍기는 민간에서 돌려야읽음

정유미 기자

과도한 정부 주도, 민간 중심 투자 생태계 교란 우려

질적 성장 미흡한 상태로 정부 투자 확대…수익률 악화 부를 수도

초기 투자 유치 수월, 성장 단계엔 되레 투자 감소 ‘악순환’도 문제

정부가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아 제2의 벤처 열풍을 일으키기 위해 막대한 예산 투자와 함께 규제완화 정책을 쏟아내고 있다. 민간기업들 역시 정부의 벤처 활성화 대책에 호흡을 맞추는 분위기다. 일각에서는 정부의 과도한 정책 추진이 자칫 민간 중심의 투자 생태계를 막을 수 있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 다시 기지개 켜는 벤처산업

정부는 최근 ‘제2의 벤처 붐’을 위해 관계부처 합동으로 대규모 벤처 확산 전략을 발표했다. 2022년까지 벤처기업에 12조원을 투자하고 인수·합병(M&A) 촉진을 위한 1조원 규모의 전용 펀드를 조성하기로 했다. 또 쿠팡, 크래프톤(옛 블루홀), 옐로모바일, 우아한형제들, 엘앤피코스메틱, 비바리퍼블리카, 위메프, 젠바디 등 현재 8개인 유니콘(기업가치 1조원 이상의 신생 벤처기업)을 2022년까지 20개로 늘린다는 계획이다. 이와 별도로 서울시는 2022년까지 2조원가량을 투입해 유니콘 기업을 15개 키운다는 방침이다. 찬반 논란에도 불구하고 비상장 투자전문회사(BDC)와 차등의결권(특정 주식에 많은 수의 의결권을 부여해 대주주 지배권 강화) 도입을 검토 중이며 벤처의 대기업집단 편입 유예기간은 현행 7년에서 10년으로 늦추고 벤처기업의 세금 부담도 줄인다. 중소벤처기업부 관계자는 “지난해 벤처투자 실적이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는데 올해는 과감한 투자와 제도 개선으로 투자 열기가 더 뜨거워질 것”이라고 말했다. 벤처업계는 바이오·정보통신기술(ICT)·게임 업종을 중심으로 활기를 띠고 있다. 바이오·의료 분야는 지난해 정부로부터 전년 대비 2배 이상 늘어난 8400억원을 지원받았으며 ICT서비스(7468억원)와 유통·서비스(5726억원), 영상·공연(3321억원)도 충분한 투자금을 확보했다. 민간기업 중 포스코는 1조원을 투자해 민관이 협력하는 벤처플랫폼을 조성하기로 했으며 삼성, SK, LG, 현대차 등은 사내 벤처 육성에 적극적이다. 대기업 관계자는 “2000년 ‘닷컴’ 붐으로 IMF 외환위기를 극복했던 것처럼 현 정부도 바이오, 핀테크, 인공지능(AI) 등을 한국 경제 신성장동력으로 삼겠다는 의지가 강한 것 같다”고 말했다.

정부가 벤처산업 육성에 사활을 거는 것은 세계 경제 지형이 바뀌고 있어서다. 미국의 구글, 페이스북, 아마존과 중국의 바이두, 알리바바, 텐센트 등 유니콘 기업들이 경제성장의 기폭제가 되고 있다. 중동의 아랍에미리트연합(UAE)은 수크와 카림의 성공 신화에 힘입어 이스라엘과 독일 등 창업 선진국을 누르고 글로벌 스타트업 허브로 급부상 중이다. 스타트업 불모지로 불리던 일본도 메루카리 등을 앞세워 실리콘밸리 등 해외 진출을 서두르고 있다.

■ 벤처강국 재도약 가능할까

지난해 한국의 스타트업 성장세는 106%로 미국(21%)과 중국(94%)을 웃돌며 역대 최대를 기록했다. 주목할 점은 투자 주체다. 한국은 정부가 앞장서고 있지만 미국은 정부와 스타트업 보육을 담당하는 액셀러레이터가 주축이다. 중국은 미국계 벤처캐피털이 이끌고 있다. 한국 스타트업 투자 생태계가 양적으로는 크게 팽창했지만 한계가 무엇인지 면밀히 따져봐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한국의 경우 초기 투자는 미·중에 비해 잘 유치하지만 선순환 구조인 창업-성장-회수로 이어지지 않고 본격 성장 단계에는 투자마저 감소해 스케일업(Scale-up·규모 확대)이 제대로 되지 않고 있다.

정부 예산이 넘치다보니 민간 중심의 투자 생태계를 막을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재계 관계자는 “벤처자금이 홍수를 이루는 데다 정부 부처가 경쟁적으로 벤처에 매달리는 분위기가 20년 전 창업거품이 생기던 시기와 비슷하다”면서 “벤처 생태계의 질적 성장이 충분히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정부 주도의 투자 확대로 투자수익률이 악화되는 부작용이 생기지 않을지 걱정”이라고 말했다.

기업들은 국내 벤처투자를 주저하는 데는 말 못할 사정이 있다고 입을 모은다. 중기벤처부가 국내 20대 기업집단 감사보고서(2016~2018년)를 토대로 기업 벤처 활동을 분석한 결과, 벤처투자를 가장 활발하게 벌인 곳은 롯데(58건), LG·GS·SK(각 19건), 현대차(12건), 삼성(10건) 등의 순이었다. 하지만 국내 대기업은 해외 벤처를 인수하는 방식이 대부분이다. 대기업의 벤처 M&A에 대한 사회인식이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대기업 관계자는 “국내가 아닌 주로 해외 스타트업을 인수하는 것은 경쟁 상대를 약화시키는 방법이기도 하다”면서 “외국처럼 벤처 빅딜이 이루어지려면 모빌리티, 원격의료, 블록체인 등 신사업 진입 장벽이 사라져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이 동북아 벤처허브로 자리매김하고 세계적인 벤처기업이 나오려면 외국 자본도 들어와야 하는데 ‘먹튀 논란’이 걸림돌이다. 국내 간편송금앱 토스의 경우 해외 벤처캐피털의 투자를 받아 글로벌 네트워크를 통한 해외 진출 교두보를 확보했지만 아직은 시작에 불과한 상황이다. 정부가 지나치게 보여주기식 성과에 집착하고 있다는 시각도 있다. 유니콘 기업은 지난해 말까지 6개에 불과했지만 문재인 대통령이 벤처 확산 전략을 언급한 지 2개월 만에 2개가 더 늘었다. 중소기업 관계자는 “글로벌 시장조사 업체인 CB인사이트가 한국 유니콘을 6개로 집계했고 한국벤처캐피탈협회가 2개를 추가 선정한 것으로 안다”면서 “유니콘은 가치 산정 수치가 기관이나 업체에 따라 달라질 수 있어 의미 부여를 크게 해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김보경 한국무역협회 수석연구원은 “올해 초 규제 샌드박스로 가시적인 성과를 내긴 했지만 성장동력에는 한계가 있다”면서 “진정한 ‘벤처 붐’은 민간 중심의 투자가 활성화될 때 올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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