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어음 자금 벤처투자하라" 정부 압박에...골머리 싸맨 초대형IB들
입력 2019.07.16 07:00|수정 2019.07.18 09:42
    일주일 새 정치권 압박→금융위 집합→증권사 해명
    단기·수시입출금식 자금으로 벤처투자 '비현실적'
    초대형IB, 심기 불편...하우스 차원 벤처투자는 증가 추세
    "ROE 제고 위해 알아서 벤처 투자 늘릴 것"
    • # 지난 6월26일. 김종석 자유한국당 의원실이 금융감독원에 요청해서 나온 초대형 금융투자사업자(IB) 발행어음 투자 내역이 공개됐다. 비판여론은 곧바로 발행어음 자금이 벤처기업에 투자한 규모가 거의 '제로'이며, 집행한 투자의 85%가 중견기업을 포함한 대기업군에 지원됐다는 점에 초점이 맞춰졌다.

      # 이틀 후인 6월28일. 금융위원회가 초대형IB 대상 간담회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금융위는 벤처·중소기업 등 혁신기업에 대한 투자 확대를 주문했다. 아울러 필요시 제도 개선과 인센티브를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 그러자 닷새 뒤인 7월3일에 한국투자증권의 발행어음 벤처 직접투자 현황이 공개됐다. 조달 자금 중 115억원을 총 5개 기업에 투자했고, 이중 한 기업은 코스닥 특례상장에 성공했다는 내용이었다. "한국투자증권은 정부 시책에 열심히 잘 따르고 있습니다"라는 신호로 해석되기 충분한 내역이었다. 

      초대형IB의 핵심 사업으로 떠오른 발행어음 사업이 때아닌 '벤처투자' 논란에 휩싸였다. 허용 취지에 맞게 '모험자본' 투자를 집행하라는 정치권의 압박, 그리고 혁신기업 성과에 목 마른 금융당국이 합세하며 말 그대로 배가 산으로 가는 모양새다.

      발행어음이 초대형IB에게 허용된 취지는 기업금융을 위한 재원을 조달하도록 하고 이를 통해 해묵은 '천수답식 영업'을 벗어나라는 점이었다. 금융위원회 역시 이를 본인들이 낸 자료를 통해 그대로 인용하고 있다.  아울러 발행어음은 애초에 단기·보장수익 상품의 특성상 벤처투자 용도로 활용하기가 어려운 자금이기도 했다. 관련 제도 도입 과정에서도 이런 부분이 반영됐다.

      그럼에도 불구, 정부가 코스닥 활성화 등 혁신기업 관련 정책에서 가시적 성과를 보지 못하며 결국 발행어음을 물고 늘어지는 게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감독당국은 겉으로는 '벤처에 투자해달라'며 독려하는 자세지만 결국 언론과 여론을 활용, "벤처에 투자하라고 허용했는데 한 건도 투자하지 않았다"라는 비판이 가해지고 있다.

      초대형IB의 발행어음은 지난 2017년 자본시장법 및 금융투자업규정 개정을 통해 도입됐다. 규정엔 조달자금의 50%는 기업대출 및 어음 매입·발행증권 취득·코넥스 및 A등급 이하 회사채 투자·기업대상 사모펀드(PEF) 투자·기업 프로젝트파이낸싱(PF)에 쓰도록 의무화돼있다. 부동산PF는 30%까지 가능하다. 20%는 자유 투자가 가능하지만, 보통 유동성으로 보유한다.

      발행어음을 도입한 지 1년 이상 된 한국투자증권과 NH투자증권은 지난 6월말 기준 '5:3:2'라고 불리는 이 규제를 한도에 맞춰 지키고 있다. 20%를 유동성 자금으로 남기는 까닭은 발행어음이 만기 1년 미만의 단기 상품인데다, 수시입출금식으로 조달한 규모가 크기 때문이다.

      은행처럼 명시적인 지급준비율 규제는 없지만, 상당수 자금을 비교적 투자기간이 긴 기업금융에 활용하는만큼 고객의 인출 요청에 대비하는 것이다. 발행어음이 도입된 지 2년도 지나지 않은 상황이기 때문에 초대형IB들은 최적의 '준비 자금 규모'를 아직 찾지 못했고, 규제 외 가용자금 대부분을 유동성으로 남기는 방법을 택하고 있다.

      어음이 기본적으로 단기 상품이기 때문에 생기는 일이다. 이는 제도 도입 과정에서도 충분히 논의됐고, 실제 규정에 반영됐다. 발행어음업 허용의 핵심 배경이 '모험자본 공급'임에도 투자 관련 규정에 벤처·중소기업 관련 규정이 최소한으로 들어간 건 이 때문이다.

      한 증권사 리스크담당 임원은 "코넥스 상장사와 주로 중소기업인 A등급 이하 하이일드(고위험) 채권은 어쨌든 최소한의 환금성을 가지고 있다"며 "투자회수 기간을 가늠할 수 없는 벤처투자는 수시입출금식 예금으로 장기 대출을 해주는 은행처럼 발행어음의 발행 규모가 충분히 커지고 규모의 경제가 작동해야 가능한 일"이라고 말했다.

      초대형IB들은 지금 상황에서 콕 집어 '발행어음으로 벤처투자를 하라'는 압박이 들어오는 것에 대해 불편한 기색이다.

      애초에 정책당국에서 증권사에 대해 요구한 '모험자본'의 정의는 '은행의 대체재'였다. 담보에 집중하고 비가 오면 우산을 뺏는 은행의 대출 행태에 맞서, 증권사가 자본시장을 활용해 기업 자금 공급 역할을 해달라는 게 정책 목표였다.

      모험자본엔 기업자금 모집주선과 인수는 물론, PEF 출자, 하이일드 회사채 인수, 심지어 파생상품 투자까지 포함된다. 그랬던 모험자본의 정의가 현 정부 들어 '벤처·중소기업에 대한 보통주 투자'로 크게 좁혀지며 불필요한 마찰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한 대형증권사 임원은 "비현실적이지만 발행어음 자금을 모두 벤처투자에 집행했다가 손실이 나거나, 환매에 대응을 할수 없게 되면 회사의 신용도는 물론 금융시장에 일대 혼란이 올 것"이라며 "코스닥 '비활성화' 정책으로 궁지에 몰린 금융당국이 알면서도 다소 무리하는 듯한 인상"이라고 말했다.

    • 대형증권사의 벤처·중소기업 투자는 외부의 압박과는 관계없이 이미 증가 추세다. 타 금융업종 대비 상대적으로 낮은 자기자본이익률(ROE)를 제고하기 위해 어쩔 수 없는 까닭이다.

      2015년 벤처캐피탈의 양대 라이선스 중 하나인 신기술사업자가 증권사에 개방된 후 현재 20여곳의 증권사가 해당 라이선스를 취득했다. 신기술조합에 대한 자기자본 3조원 이상 종합금융투자사업자의 직접 투자 금액은 2017년 1019억원에서 지난해 1482억원으로 늘었고, 올해 상반기에만 1164억원이 집행됐다.

      창투조합·PEF·직접투자를 합치면 종합금융투자사업자들의 '모험자본' 투자 규모는 지난해 전년대비 3배 상승해 1조원을 넘어섰다. 올해 상반기에만도 이미 집행 금액이 6300억여원에 이른다. 이들의 자금이 포함된 전체 투자 약정 규모는 지난해 14조원, 올해 상반기 5조8000억여원이다.

      초대형IB는 조달된 발행어음을 사실상 자기자본투자(PI)에 준해 운용하고 있다. 리스크가 크고 회수기간이 비교적 긴 투자에서 발행어음은 소액을 실험적으로 투입하는 보조적 수단이다. 규모가 충분치 않고 여차하면 돌려줘야 하는 발행어음 조달 자금은 아직 공격적으로 투자하기가 쉽지 않다는 게 현장의 목소리다.

      정부의 압박에 초대형IB들은 일단 몸을 낮추는 모습이다. 발행어음업 허용 때 업종 특혜 논란이 일며 은행을 중심으로 견제의 목소리가 컸던 까닭이다. 자칫 잘못 여론의 조성돼 운용 규제에 명시적인 벤처·중소기업 투자 항목이 들어가면 마진을 확보하기가 쉽지 않아진다.

      다만 외부의 시선을 의식해 기존보다 발행어음에서 관련 투자 집행을 늘려가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발행어음 도입 전부터 중견기업 중심 중위험 중~고수익 운용 전략을 확립한 한국투자증권은 비상장기업 중심 투자를 늘려가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전통적으로 강한 면모를 보이는 기업공개(IPO) 부서와 연계하는 전략이다. 지난 2017년 사모시장에서의 히트상품 중 하나인 상장 전 투자(Pre-IPO) 펀드 강화 등이 언급된다.

      NH투자증권은 지난 2017년 7월 대형증권사 가운데 처음으로 신기술사업자 라이선스를 취득했다. 'NH하이테크제1호'가 투자한 RFHIC 등 혁신기업이 스팩합병을 통해 상장에 성공하며 짭짤한 수익을 내기도 했다. 대형증권사의 벤처투자 시장엔 아직 이렇다 할 경쟁자가 없는 상황이라 성공사례 쌓기에 주력하고 있다.

      아직 라이선스를 발급받지 못한 미래에셋대우는 하반기 벤처투자 시장을 좌지우지할 대형'메기'로 꼽힌다. 미래에셋금융그룹은 계열사인 미래에셋캐피탈과 미래에셋벤처투자를 통해 벤처 운용 노하우를 축적한 상황이다. 여기에 미래에셋대우의 자기자본 8조원, 발행어음 최대 16조원의 자금력이 합쳐지게 된다.

      미래에셋대우는 발행어음 담당 태스크포스(TF)를 세팅하고, 벤처투자는 물론 글로벌·대체투자 등 가능성을 살피고 있다. 미래에셋대우는 이미 자기자본으로 벤처투자에 상당액을 집행했다. 미래에셋캐피탈이 운용(GP)라고 미래에셋대우가 주요 투자자(LP)로 나선 사모펀드를 통해 중국 차량공유업체 디디추싱에 2800억원, 동남아 승차공유업체 그랩에 1700억원 등을 투자한 상태다.

      한 증권사 관계자는 "돈에는 꼬리표가 없기 때문에 발행어음 중 얼마가 벤처투자에 쓰였냐보다는 해당 증권사가 벤처투자에 어떻게 접근하고 있느냐가 더 중요하다"며 "금융당국이 압박하지 않아도 투자 여건만 잘 마련해주면 초대형IB의 자금은 고수익을 낼 수 있는 곳으로 흐를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