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의 맥] 시장주도 혁신생태계로 가야 '진짜 벤처붐' 온다
중소벤처기업부에 이어 문재인 대통령도 신규 유니콘기업(기업가치 1조원 이상 비상장사) 탄생과 더불어 2019년 상반기 신규 벤처투자가 역대 최고치를 달성한 점을 들어 벤처붐 확산이 가시화되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반론도 만만찮다. 돈만 푼다고 벤처붐이 일고 있다고 말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정부 말대로 벤처붐이 오고 있는지, 그렇게 말하기는 이른지 판단하려면 무엇보다 ‘제1 벤처붐’과 비교해봐야 한다. 정부가 ‘제2 벤처붐’의 가장 큰 근거로 제시하는 지표는 신규 벤처투자 증가다. 상반기 벤처투자가 1조8996억원으로 늘어 이 추세라면 올해 전체 투자는 지난해 3조4249억원을 넘어 4조원에 이를 것이란 게 정부 전망이다.

2000년 2조211억원을 기록한 벤처투자가 2015년 2조원을 재돌파한 데 이어, 지난해 3조원 돌파 그리고 올해 4조원을 목전에 두고 있는 점을 고려하면 2차 벤처붐이라고 할 만하지 않느냐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 수치만으로 제2 벤처붐이 오고 있다는 정부 ‘홍보’에 시장이 동의할지 의문이다. 정부가 고무적이라고 말하는 벤처투자만 해도 경제 규모(GDP) 대비 비중을 따지면 지난해 0.19%에 불과해 2000년 0.32%에는 한참 못 미치는 수준이다. 미국(0.64%) 중국(0.26%) 등과 비교해도 크게 떨어진다.

정부 출자 모태펀드에 크게 의존하는 점도 문제다. 지난해 벤처펀드 출자에서 모태펀드 등 정책금융이 차지하는 비중은 32.6%였다. 최근 벤처투자 증가가 문재인 정부 출범 후 추경에서 8000억원으로 늘린 모태펀드 투입에 힘입은 바가 크다는 점은 중기부도 인정하고 있다. 게다가 정부는 올 하반기 벤처펀드 결성에서도 모태펀드(1조3000억원)에 잔뜩 기대를 걸고 있다.

벤처붐의 재도래를 아직 확신하기 어려운 이유는 또 있다. 벤처투자 말고는 이를 지지할 다른 지표를 찾기 어렵다는 점이다. 벤처붐과 관련성 높은 엔젤투자만 해도 지난해 4000억원을 돌파했지만 2000년 5493억원에는 이르지 못했다. 엔젤투자자 수도 9580명으로 2000년 2만8875명의 3분의 1에 불과하다. 경제 규모 대비로 보면 미국의 엔젤투자 비중은 2017년 기준 0.12%인 데 비해 한국은 0.02%에 불과하다.
[뉴스의 맥] 시장주도 혁신생태계로 가야 '진짜 벤처붐' 온다
코스닥 L커브, 나스닥 J커브

정부 인증 벤처기업이 2000년 8798개에서 현재 3만7000개에 육박한다는 점도 그렇다. 이 중 벤처캐피털(VC) 투자를 받은 기업은 전체의 5%도 채 안 된다. 기술평가 보증이나 기술평가 대출을 받은 기업이 대부분을 차지한다는 점에서 벤처붐을 판단할 유효한 지표로 보기 어렵다는 얘기다.

코스닥으로 눈을 돌리면 벤처붐 얘기를 꺼내기가 더욱 머쓱해진다. 코스닥 최고 지수는 2000년 2834.40을 기록한 이후 올 7월 기준 767.85에 머물러 있다(L자 커브). 반면 미국 나스닥 최고 지수는 2000년 5048.62를 기록한 이후 2016년 5487.44로 기록을 갈아치운 데 이어, 지난 7월 기준 8330.21로 올라섰다(J자 커브). 1998~2000년에는 세계적인 정보기술(IT) 붐 속에 코스닥에도 투자가 몰렸다. 하지만 세계가 인공지능(AI) 등 4차 산업혁명이란 새로운 기술적 기회를 맞이하는 지금, 한국 코스닥은 미국 나스닥과 달리 힘을 받지 못하고 있다.

유망 투자기회 부족도 문제

미국에서 투자회수 시장으로 기업공개(IPO)보다 훨씬 큰 역할을 하는 인수합병(M&A)도 벤처를 사줘야 할 대기업에 대한 각종 규제로 활성화되지 않고 있다. 미국에서 흔한 기업주도형 벤처캐피털(CVC) 설립조차 자유롭지 못하다. 여기에 정부와 국회가 기술탈취 문제까지 제기하면서 대기업은 해외벤처 인수로 눈을 돌리는 실정이다.

인력 흐름 측면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제1 벤처붐 당시에는 대기업과 공공부문의 우수 인력이 벤처기업으로 대거 이동하는 현상이 뚜렷했다. 대학, 정부출연연구소발(發) 창업도 활발했다. 정부는 최근 창업 열기가 확산되고 있다고 말하지만, 제1 벤처붐 때처럼 우수 인력이 창업으로 쏠리고 있다는 증거는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제2 벤처붐은 언제 오는가? 앞에서 제1 벤처붐과 지금의 상황을 벤처생태계를 구성하는 주요 요소별로 비교한 결과는 제2 벤처붐으로 가려면 여전히 넘어야 할 산이 있음을 보여준다. 먼저 투자 측면이다. 경제 규모 대비 벤처투자 비중도 그렇지만, 연간 500조원을 넘는 국내 기업금융을 감안하더라도 벤처투자는 3조~4조원보다 훨씬 더 큰 규모로 늘어야 한다. 그러려면 정부가 아니라 자금조달 능력과 유망 벤처를 알아보는 판단력을 갖춘 VC와 함께 민간 금융기관, 엔젤 등이 투자를 주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정책금융 구조개혁, 투자은행 등 기업금융 선진화, 금융규제 철폐, 진입장벽 제거 등 글로벌 경쟁력을 높이는 금융혁신과 함께 민간 혁신금융의 공급 확대가 절실하다.

투자자가 몰려들게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유망 투자 대상이 많아야 한다. 글로벌 투자자들이 넘쳐나고 국경을 넘는 크라우드펀딩도 가능하지만 한국에는 투자할 만한 벤처가 부족하다는 지적이 나오는 것은 뼈아픈 대목이다. 신산업 등 투자 대상을 제한하는 규제 철폐에 속도를 내야 하는 이유다.

‘정부가 왜 벤처를 인증하느냐’는 문제 제기에도 주목할 때가 됐다. 투자자에게 정확한 시그널을 주려면 ‘VC가 투자한 기업이야말로 시장이 인정한 벤처’란 인식이 필요하다. 기술력도, 경영능력도 없이 대출받기 위해 정부 인증을 받은 ‘무늬만 벤처’가 넘쳐나면 결국 투자자들이 외면해 진짜 기술벤처가 피해를 입게 된다.

VC는 성공적인 회수, 다시 말해 돈을 벌기 위해 투자한다. 미국에서 VC가 투자한 벤처의 경영 등 의사결정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따라서 벤처붐이 일어나려면 IPO와 M&A의 정상화·활성화는 필수다.

우수 인력의 지속적인 창업시장 유입도 숙제다. 선진국에서는 대학을 중퇴하고 창업하는 게 전혀 이상하지 않다. 대학 입학 이전부터 배워온 기업가정신과 창업 교육, 창업에 대한 사회의 긍정적 인식 때문이란 분석이 많다. ‘생계형 창업’이 아니라 ‘슘페터형 창업’이 많은 이유도 마찬가지다.

시장은 진짜 벤처붐 기다려

혁신 경제는 끊임없는 창조적 파괴를 엔진 삼아 굴러간다. 혁신 경제에서 자본주의를 하려면 새로운 것이 만들어내는 붐 그리고 이에 따른 조정은 불가피하다. 미국이 보여주듯 시장이 주도하는 붐은 금융시장에서 버블로, 또 붕괴로 이어지더라도 조정이 끝나면 다시 회복하는 과정을 거친다. 4차 산업혁명을 기회로 ‘J자 커브’를 보여주는 미국 나스닥이 그렇다.

반면, 정부 주도 벤처붐은 비록 온다고 해도 오래가지 못하고, 붐이 붕괴되면 정치적 ‘희생양 찾기’ 소동으로 이어질 위험이 있다. 시장이 스스로 조정할 힘을 상실한 채 정치가, 정부가 개입하기 시작하면 시련의 기간도 그만큼 길어질 수밖에 없다. 최근 세상을 떠난, 한국 벤처업계 대부로 불리는 이민화 전 메디슨 회장도 이런 현실을 안타까워했다. 정부는 제2 벤처붐이 오고 있다지만 시장은 진짜 벤처붐을 기다리고 있다.

ahs@hankyung.com